국제사법재판소 관할권 & 재판준칙
I. 당사자 능력
ICJ에서는 국가만이 재판사건의 당사자 능력을 갖는다(제34조 1항). 모든 UN 회원국은 자동적으로 ICJ 규정 당사국이 되어, ICJ 재판에서의 당사자 능력을 획득한 다. 과거에는 UN 비회원국으로 ICJ의 당사자 능력을 얻는 방법도 활용되었으나, 사실상 모든 국가가 UN 회원국으로 된 오늘날에는 현실적 의미가 사라졌다. 국제기구나 개인은 ICJ에서 재판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II. 관할권의 성립 근거
ICJ 규정 당사국이라 하여 ICJ의 재판관할권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ICJ의 관할권 성립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주권 국가의 별도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동의는 분쟁이 발생한 이후 사후적으로 부여될 수도 있고, 구체적인 분쟁이 발생하기 이전에 사전적으로 부여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ICJ와 개별 국가와의 관계는 국내법 질서에서 법원과 개인(또는 단체)간의 관계와는 성격상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렇듯 ICJ가 규정 당사국에 대하여 강제적 관할권을 일반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고, 양 분쟁 당사국으로부터 별도의 수락 동의를 받아야만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구조를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분쟁에 대하여 사전에 ICJ 의 관할권을 수락하는 데 불안을 느끼는 국가들이 많으며, 또한 사법적 해결이 국 가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최종적이거나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국제정치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ICJ 관할권에 대한 동의를 부여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특별 협정의 체결
기에 발생한 분쟁을 당사국들이 ICJ의 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를 보통 특별 협정(special agreement, compromis)이라고 한다. 마치 분쟁 당사국들이 사건을 중재재판에 회부하는 것과 동일한 형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건이 ICJ에 회부된 경우에는 원고, 피고의 개념이 적용되지 아니한다.
2. 조약의 규정
장래에 발생하는 분쟁을 ICJ로 회부하기로 조약에 미리 규정하여 놓는 방식이 다. 즉 양자 또는 다자조약을 체결하면서 그 조약의 해석과 적용에 관하여 당사국 간에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이를 ICJ로 회부하기로 규정하고, 후일 이에 관한 분쟁 이 발생하였을 때 일방 당사국이 사건을 ICJ로 제소하면 다른 당사국은 원래의 조 약상의 의무에 따라 재판에 응할 의무를 지는 방법이다. 조약 자체에 분쟁의 ICJ 회 부를 규정하는 방법도 있고, 17) 별도의 분쟁 해결에 관한 의정서를 당해 조약의 부속 조약의 형식으로 채택하는 방식도 있다.18) 이같은 방식으로는 어디까지나 특정의 조약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분쟁에 대하여만 ICJ의 관할권이 성립한다. 사전에 이러 한 조항이 만들어져 있다면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 당사국들로 하여금 더욱 성실히 외교적 타결을 성사시키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편 특정한 조약에 한정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조약을 성립시키는 방식으로 ICJ에 관할권을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양국 간 무역에 관한 일체의 분쟁은 ICJ에 회부하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
3. 선택조항의 수락
ICJ의 당사국은 동일한 의무를 수락한 국가와의 관계에서 재판소의 관할권을 미리 수락해 놓을 수 있다. 이를 선택조항(optional clause)의 수락이라고 한다. 선택 조항이란 다음의 ICJ 규정 제36조 2항을 가리킨다.
재판소 규정의 당사국은 다음 사항에 관한 모든 법률적 분쟁에 대하여 재판소의 관할을, 동일한 의무를 수락하는 모든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당연히 또한 특별한 합의 없이도, 강제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언제든지 선언할 수 있다.
가. 조약의 해석
나. 국제법상의 문제
다. 확인되는 경우, 국제의무의 위반에 해당하는 사실의 존재
라. 국제의무의 위반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배상의 성질 또는 범위
국가가 아무런 조건 없이 선택조항을 수락한다는 것은 자국이 당사국인 모든 분쟁에 대하여 항시 ICJ의 관할권을 수락할 자세가 되어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다. 선택조항의 수락은 동일한 의무를 수락한 타국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에 관하여만 관할권을 사전에 수락하는 것이다. ICJ의 입장에서는 분쟁 당사국 쌍방의 수락 선언의 내용이 중첩되는 범위 내에서만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국가가 선택조항을 수락하면 ICJ와 개별국가 간의 관계는 국내법에서 자국 법원과 개인간의 관계와 흡사하게 된다. PCIJ부터 기원하는 이 조항은 국제재판소에 강제적 관할권을 인정하자는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입장간의 일종의 절충점으로 마련된 방안이다. 선택조항의 수락선언은 철회하거나 수정할 수 있으며, 실제로 한번 수락하였던 선언을 철회한 국가도 적지 않다. 다음의 ICJ 판결문은 선택조항의 법적 성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
Any State party to the Statute, in adhering to the jurisdiction of the Court in accordance with Article 36, paragraph 2, accepts jurisdiction in its relations with States previously having adhered to that clause. At the same time, it makes a standing offer to the other States party to the Statute which have not yet deposited a declaration of acceptance. The day one of those States accepts that offer by depositing in its turn its declaration of acceptance, the consensual bond is established and no further condition needs to be fulfilled. (Land and Maritime Boundary between Cameroon and Nigeria (Preliminary Objection), 1998 ICJ Reports 275, para. 25)
실제로 각국이 선택조항을 수락할 때에는 갖가지 유보를 첨부한다. 선택조항에 의한 관할권은 양 분쟁 당사국이 공통으로 관할권을 수락한 범위 내에서만 성립되므로, 일방 당사국이 첨부한 유보의 효과는 상호주의적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유보의 내용으로는 선택조항의 수락에 있어서 기한을 첨부하는 것이다(예: 수락일로부터 5년간만 유효하고, 그 이후에는 새로운 의사표시를 할 수 있다는 유보). 기타 자주 첨부되는 유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다른 평화적 해결수단이 마련되어 있는 경우 ICJ의 관할권을 배제한다는 유보. 2) 특정 시점 이후에 발생한 분쟁에 대하여만 ICJ의 관할권을 인정한다는 유보. 3) 특정한 사실이나 상황에 관한 분쟁은 배제시킨다는 유보. 4) 국가안보나 영토문제 등 국가의 중대한 이익에 관련된 분쟁은 관할권에서 배제시킨다는 유보. 5) 자국의 국내 문제에 관한 사항은 ICJ의 관할권에서 배제시킨다는 유보 등.
선택조항에 대한 유보는 이 조항의 본래 취지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나, 애당초 사법적 해결의 의지가 없는 사항에 대하여도 이를 강요하는 것이 반드시 국가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이르는 길은 아니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국내문제는 국제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본래 ICJ의 관할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국내문제를 ICJ 관할권에서 배제시키면서 무엇이 국내문제인지를 자국이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유보를 첨부한 국가가 적지 않다. 1946년 미국이 선택조항을 수락하면서 이러한 유보를 첨부하였었고, 적지 않은 국가가 같은 예를 뒤따랐다. 이에 의하면 ICJ에 피소된 국가는 대상분쟁이 자국의 국내관할사항이라고 선언함으로써 ICJ의 관할권을 자동적으로 부인할 수 있게 된다(자동유보). 이는 관할권의 존부는 ICJ 스스로 결정한다는 규정 내용과 어긋난다는 평가도 가능하다(제36조 6항). 또한 국제분쟁에 있어서 무엇이 국내문제인가의 결정은 국제법상 문제라는 원칙에도 위배된다. 그러나 자동유보의 선언이 과연 유효한가와 만약 유효하다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ICJ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2012년 10월 현재 66개국이 선택조항 수락선언을 하고 있으며, 그 중 제3세계 국가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과거 선택조항을 수락하였다가 이를 철회한 국가도 13개국이나 된다. 한국은 아직 수락선언을 하지 않았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에는 영국만이 선택조항을 수락하고 있다. 19) 일본은 1958년 9월 15일 선택조항을 수락하였는데, 단 수락일 이후 발생한 분쟁에 대하여만 ICJ의 관할권을 수락하고 있다.
4. 기타
ICJ의 관할권은 다른 방법에 의하여도 성립될 수 있다. 즉 응소 의무가 없는 국가가 관할권 불성립의 항변을 포기하고 소송에 참여하면 관할권은 성립한다. 20) 일단 성립된 관할권은 재판의 후속단계에서는 부인할 수 없다. 관할권을 부인할 항변 의 포기는 명시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관할권을 부인하지 않는 일련의 행동을 통하여 묵시적으로 표시될 수도 있다. 이를 확대관할권(forum prorogatum)이라고 한다. 21) 단 ICJ의 관할권을 부인하려는 목적만으로 출정한 것으로는 확대관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22) PCIJ에서는 물론 ICJ 규정상으로도 확대관할권을 인정하는 조항은 없다. 이는 재판소의 실행을 통하여 발전되어 온 제도이다. 다만 1978년 ICJ 규칙 제38조 5항의 개정 이후에는 관할권 성립의 근거가 없이 일방적으로 소송을 신청하는 경우 상대 국의 수락의사를 먼저 확인하도록 되어 이제 명시적 동의 없이 일련의 행동만으로 확대관할권이 성립되기는 과거보다 한층 어려워졌다.
한편 ICJ 규정 제36조 5항은 PCIJ 당시의 선택조항을 수락한 국가는 ICJ의 관할 권을 계속 수락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PCIJ의 관할권을 수락한다고 규정한 조약은 오늘날 ICJ의 관할권을 수락한 것으로 인정된다(제37조).
제소 사건에 대하여 관할권이 성립하는가는 관련사실을 바탕으로 재판소가 결정한다. 관할권의 성립 여부는 제소 시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 때 일단 관할권이 성립되었다면, 이후의 사태 발전은 관할권의 존속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설사 상황 변화로 인하여 제소가 가상적인 일로 되어 버렸어도 재판소의 관할권이 자동으로 소멸되지는 않는다. 23)
II. 재판 준칙
자신에게 회부된 분쟁을 국제법에 따라 재판함을 임무로 하는 ICJ는 1) 조약 2) 관습국제법 3) 법의 일반 원칙 4) 법칙 발견의 보조 수단으로서의 판례와 학설을 적용하여 재판한다 (제38조 1항). 이상의 내용에 대하여는 국제법의 법원편에서 설명된 바 있다. ICJ의 판결은 해당 사건에 대하여만 구속력을 지닌다 (제59조). 판례는 법칙 발견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며, 영미법에서의 같은 선례 구속성의 원칙은 인정되지 아니한 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입장에 불과하고 ICJ는 선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평가가 오히려 적절할지 모른다. 24) 실제로 ICJ는 판결을 내림에 있어서 자신과 PCIJ의 판례를 빈번하게 인용한다. 새로운 재판의 법적 쟁점이 과거의 선례와 동일할 경우 ICJ로서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오히려 자신의 선례를 이탈하기가 쉽지 않다. ICJ 가 과거의 선례와 다른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단순히 선례를 무시하기보다 새 판결 은 선례를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과거의 사건과는 차이점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다만 ICJ가 다른 국제재판소나 국내 재판소의 판례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삼가고 있다. 학설도 법칙 발견의 보조 수단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ICJ의 다수 의견이 개인 학자의 이름을 인용하는 예는 없었다.
한편 분쟁 당사국이 합의하는 경우 ICJ는 형평과 선 (ex aequo et bono)에 의하여 재판할 수 있다 (제38조 2항). 형평과 선에 의한다는 것은 형평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실 “형평과 선”이 PCIJ 규정에 삽입되기 이전에는 국제법학계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던 개념은 아니었으나, 재판부에 재량의 폭을 준다는 취지에서 별 다른 논란 없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PCIJ 이래 아직까지 형평과 선에 따라 판결을 내린 예는 없다는 점에서 삽입의 의도는 달성되지 못한 셈이다.
1982년 해양법 협약이 양국 간에 조약으로서 적용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양 당사국은 이 협약의 내용을 관습국제법으로 인정하고 이를 재판 의 근거로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ICJ는 이러한 양국의 입장을 존중하여 해당 조항 이 관습국제법으로 성립되어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고 바로 재판의 준칙으로 적용하 였다. 만약 그 내용이 관습국제법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워도 재판부는 협약 조항 을 재판의 준칙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이는 경우에 따라서 재판 당사국이 ICJ에 재 판의 준칙을 임의로 지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