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J 권고적 의견 및 미결의 문제
I. 권고적 의견
국제기구는 ICJ에서 재판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 없으나, 대신 법률문제에 관한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요청할 수 있다(제65조).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과 달리 권고적 의견제도의 목적은 국제기구에 대한 법률자문의 제공이다. 따라서 구체적 사건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 성격의 질문도 가능하다.
권고적 의견의 부여는 오직 국제기구만이 요청할 수 있으며, 국가나 개인에게는 이러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기구 역시 국가로 구성된 단체이므로 결국 권고적 의견의 요청은 국가의 의사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 국가가 아닌 다수결에 입각한 복수 국가의 공동의사에 입각하여 요청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제기구의 헌장 등에 일정한 상황에서는 미리 규정하기도 한다.
ICJ는 국제기구 내에서 권고적 의견 요청을 발의하거나 이 결정에 찬성한 개별국가들의 구체적 동기는 상관하지 않는다. 또한 국제기구가 권고적 의견을 요청한 목적도 상관하지 않는다. 권고적 의견이 기구의 임무수행에 필요한가 여부는 1차적으로 기구 자신이 결정할 문제로 보고 있다.
모든 국제기구가 ICJ에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ICJ에 권고 적 의견을 요청할 수 있는 국제기구는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UN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는 어떠한 법률문제에 관하여도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수 있다. 둘째, 총회에 의하여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자격이 부여된 UN의 다른 기관 및 전문기구는 자신의 활동범위에 속하는 법률문제에 관하여 이를 요청할 수 있다(제96조). 현재 총회와 안보리 외에 경제사회이사회 등 4개의 UN 기관과 15개 전문기구, 1개의 관련기구(IAEA)가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자격을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의견을 요청한 기관은 총회이다. UN의 주요 기관 중에는 사무국만이 이 권한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권고적 의견은 법률문제에 관하여만 요청할 수 있다. 법률문제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ICJ는 국제법에 따라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문제는 법률문제라며 이 를 폭 넓게 해석하고 있다. 비록 그 문제가 정치적 성격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하여 도, 그것만으로는 법률문제로서의 성격이 부인되지 않는다.
In the present case, the question put to the Court by the General Assembly asks whether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o which it refers is “i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law.” A question which expressly asks the Court whether or not a particular action is compatible with international law certainly appears to be a legal questio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Law of the 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 respect of Kosovo. Advisory Opinion, 2010 ICJ Reports, para. 25)
권고적 의견에 관하여는 당사국이 없다. 그 결과 또한 구속력이 없고 권고적 효력뿐이다. ICJ 역시 의견 부여 요청을 반드시 수락할 의무는 없으며, 요청의 수락 여부는 재량사항이다. ICJ는 권고적 의견의 요청이 현재 국가들 간에 계쟁 중인 법률 문제에 관계된 것인가 여부를 검토하도록 되어 있으나(규칙 제102조 2항), 국가의 권리가 문제되는 경우에도 ICJ는 의견 부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아 왔다.
PCIJ는 국가간 분쟁의 핵심적 쟁점과 관련된 권고적 의견의 부여는 주저하였으나, 점차 적극적으로 의견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ICJ는 권고적 의견의 부여가 UN 기관의 하나인 자신의 UN 활동에의 참여를 의미하며, 이는 원칙적으로 거부되지 말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오직 “긴요한 이유(compelling reasons)”가 있는 경우에만 거부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권고적 의견의 부여가 당사국의 합의 를 전제로만 진행될 수 있는 재판사건에 대한 일종의 우회적 제소로 활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권고적 의견의 요청이 기구의 활동범위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관련이 없는 경우 ICJ는 의견의 부여를 거절한다. PCIJ와 ICJ는 각각 한 번씩 의견 부여를 거절한 사례가 있다.
의견 부여 절차는 재판사건과 유사하게 진행되어 서면 제출 단계와 구두 변론 단계로 나뉘어 진행된다. 특정 국가의 권리와 관계되는 사건인 경우 Judge ad hoc도 임명될 수 있다. 판단의 준칙도 재판사건과 동일하다. 대체로 재판사건보다는 신속히 진행된다. 국가는 권고적 의견을 직접 요청할 수는 없지만, 제기된 권고적 의견 절차에 참여하여 서면 또는 구두로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 다른 국제기구도 의견 을 제출할 수 있다. 권고적 의견의 효력은 “권고적”에 불과하나, 이를 요청한 기구 가 ICJ의 의견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기로 합의한다면 구속력이 인정될 수는 있다. 그간 권고적 의견은 비록 법적 구속력이 없을지라도 국제사회에서 종종 국제 법의 유권적 해석으로 인식되어 왔고, 국제법 원리의 발전과 확인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II. 미결의 문제들
CJ가 UN의 주요 사법기관으로 국제사회에서 기대만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느냐에 대하여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아직 주권 국가가 결정적 국익이 걸린 문제에 대하여는 ICJ로의 제소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현재 선택조항을 통하여 ICJ의 관할권을 수락하고 있는 UN 회원국의 비율은 국제연맹시절의 PCIJ의 경우보다 낮은 실정이다. 선택조항을 수락하였던 국가들도 이를 철회하거나, 더욱 복잡한 유보를 첨부하는 경향조차 나타난다. 일반조약에서도 ICJ를 최종적 분쟁해결기관으로 지정하는 빈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ICJ가 사건확보를 위하여 관할권 인정에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보임에 따라 원하지 않는 소송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주권 국가들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PCIJ 이래 ICJ가 국제법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여 왔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한 세대 전에 비하면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ICJ에의 제소가 급증하고 있고, 특히 과거 ICJ에 대하여 회의적 시각을 가졌었던 제 3세계 국가들의 제소도 적지 않다. 지금은 오히려 제소가 지나치게 많아 사건처리에 과부하가 걸려 있는 것이 ICJ의 새로운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건 수의 증가에 따라 판결까지 점점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향이 있고, 그렇다면 보다 신속한 처리를 원하는 국가는 다른 해결수단을 찾으려 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ICJ 사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던 해양 관련 분쟁은 국제해양법재판소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ICJ 사건 수의 증가는 국제사회가 더욱 법을 통한 평화적 분쟁해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현재 ICJ의 구조와 관련하여 국제기구에 대하여도 재판사건의 당사자 자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개별 국가에 대하여도 권고적 의견을 요청할 자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UN 내에서는 특히 사무총장에게 권고적 의견 요청 자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ICJ는 기본적으로 양자간 분쟁해결을 위한 절차에
입각하고 있으며, 제3국의 소송참가에 대하여 조차 지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는데 반하여, 앞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점점 다자간 또는 지역적 성격의 분쟁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바 ICJ가 이 부분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역시 미래의 숙제이다. 근래 국제사회에는 ICJ 외의 다른 국제재판기구들이 여럿 설립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적으로는 국제법 법리의 혼선과 불일치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같은 부작용보다는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의 역할을 제고시키고, 국제법의 활력을 도모하는 기능이 더 크다고 평가된다.
한편 냉전 종식 이후 ICJ와 안전보장이사회와의 관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안보리는 현재 거부권의 늪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그 활동범위와 역할을 크게 넓히고 있다. 특히 헌장 제7장에 근거한 강제조치의 발동이 빈번해졌다. 그 과정에서 안보리는 국제법상 책임의 소재를 결정하고, 위법행위에 대한 보상 방법을 정하기도 하고, 개인의 국제법상의 형사책임을 추궁할 재판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특정 국가의 행위가 국제법상 무효라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이 때 안보리의 결정이 국제법에 합치되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 ICJ가 이의 합법성을 판단할 권한이 있는가? 과거 ICJ에 제기된 사건에서 일부 당사국은 안보리의 결의가 UN 헌장 등의 조약이나 관습국제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했다. Lockerbie 사건에서 리비아는 미국과 영국의 용의자 인도 요구는 1971년 몬트리올 조약에 위배되며, 따라서 관련 안보리 결의(1992년 제731호와 1992년 제748호)는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에서 일단 ICJ는 일반 조약상의 의무보다 UN 헌장상의 의무가 우선한다는 헌장 제103조에 따라 안보리 결의가 몬트리올 조약에 우선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ICJ는 안보리의 결정, 특히 헌장 제7장에 의한 강제조치의 합법성에 대하여 사법심사를 할 권한이 있는가? Lockerbie 사건에서 이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2003년 합의에 의하여 종료되었기 때문에 ICJ가 이 점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기회는 사라졌지만 강대국들은 ICJ의 그러한 권한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그 이유로 우선 UN 헌장이나 ICJ 규정에 그 같은 권한을 인정하는조항이 없으며,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이를 인정하자는 벨기에의 제안이 거부되었던 점을 증거로 들고 있다.
현장 제7장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안보리는 폭넓은 재량을 가지며 이러한 안보리의 판단이 일단 회원국을 구속한다. 그러나 안보리의 결정이 명백히 기존 국제법과 상치될 경우 그 구속력이 회원국의 도전을 받을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 재판사건이나 권고적 의견의 부여 형식으로 ICJ가 안보리 결의의 합법성을 부인할 수 있는가? 헌장에는 안보리와 ICJ의 관계를 규율하는 조항이 없다. UN의 구조상 ICJ가 안보리에 구속되지 않으므로 ICJ는 독자적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나, 안보리의 독특한 위치와 현실의 국제정치에서 상임이사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다.
ICJ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좀 더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분쟁을 반드시 사법적으로 해결할 의무가 없는 상황에서 각국은 승소가 확실하지 않으면 패소의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ICJ를 이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타국을 법정으로 몰고 가는 것이 종종 비우호적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특히 기존의 국제법에 따르면 불리한 결과가 우려되는 국가들은 차라리 “있어야 할 법 (lege frenda)”의 형태로 국제법의 변경을 주장하려 할 것이다. 아니면 국제정세가 좀 더 유리하게 변경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할 것이다. ICJ에서의 재판은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소요하며, 승소하여도 강제적 집행방법이 없기 때문에 분쟁의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ICJ와 같은 사법기관 또한 어쩔 수 없이 강대국에게 유리하게 판정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국내법보다 불명확한 부분이 많은 국제법의 경우 정치가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 모두 현재와 같은 분권적 구조의 국제사회에서는 단시일 내에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들이다.